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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동구 '왕십리' 지명 유래 2가지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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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십리(往十里)라는 동명의 유래는 조선 초에 무학 대사가 도읍을 정하려고 이곳에 와서 도선 대사의 현성(顯聖)인 이름 모를 촌로로부터 십 리를 더 가라는 가르침을 받았기 때문에 '왕십리'라 했다고 널리 알려져 있다.

오늘은 '왕십리'라는 지명에 대한 유래에 대하여 알아보도록 하자.


무학대사


개국 조선 이태조가 등극하자 그는 곧 안변에 있는 무학대사를 초청하여 왕사를 삼았고, 무학 대사에게 곧 새 도읍터를 잡으라고 명하였다.
왕명을 받은 무학 대사는 먼저 충청도 공주로 내려가 계룡산을 택한 다음 그곳을 신도(新都)라 이름 짓고 공사를
시작 하였다.

그런데 태조의 꿈에 신령이 나타나서

"계룡산은 그대가 도읍할 자리가 아니니 새로 옮기도록 하라."

했으므로 태조는 즉시 무학 대사에게 공사를 중지하고 다시 다른 곳을 택하라 분부하였다.

때는 1393년(태조2) 12월로 그 해를 전후해 왕사(王師) 무학은 태조의 명을 받들어 한산주 일대를 찾아 다녔다.
당시 한산주는 첩첩산중이었고 뒤로는 험한 바위산이요, 앞으로는 푸른 한강이 흐르고 목멱산(木覓山)(남산南山)은 푸른 숲에 묻혀 험하기 짝이 없었고 북한산과 목멱산 사이에는 가시나무 등 잡목이 우거졌다.

그리고 배수가 잘 되지 않아 질퍽질퍽한 늪이었다. 그렇다보니 지형과 방향을 잘 잡을 수가 없어 어디가 어디인지 알 수 없어서 일단 무학 대사의 발길은 북한산 상봉을 향했는데 현재 성동구 왕십리 자리가 제일 눈에 들어왔다고 한다.
산 위에서 볼 때와는 달리 그곳을 찾기가 어려웠고, 겨우 부근에 다다랐을 무렵 무학대사는 지치고 말았다.

왕십리


힘겨움에 일행과 함께 잠시 동안 갈대밭에서 쉬기로 하고 앉았으나 궁터 자리 찾을 일이 걱정이었다.
그런데 어느 남루한 차림의 촌로가 누런 소를 타고 나타났다. 이상히 여긴 무학이 바라보고 있자 촌로는 조롱 섞인 말을 던졌다.

"세상에 자초라는 놈이 이렇게 어리석고 무식할 줄은 몰랐다."

촌로는 무학 대사의 마음을 여지없이 건드렸다. 그래도 무학이 누구신지 공손하게 물으니

"이놈 자초야, 네가 그 능력으로 궁터를 얻으려 했느냐. 이곳은 구릉지인 관계로 도읍지 궁궐 자리가 되지 못하니 이곳에서 서북 방향으로 10리만 더 들어가 보아라. 네가 원하는 터가 있을 것이다."

하면서 유유히 사라졌다. 이상히 여긴 무학이 일행과 함께 서북 방향으로 걸음을 가늠하여 갈대숲을 헤치고 가 보았다. 그곳은 과연 자초가 찾던 터였고, 그 이상 더 좋은 터는 없다고 생각하여 바로 개경에 있는 태조에게 돌아가 고하였다.
그자리가 현재의 경복궁이다.

그 후 무학은 남루한 차림으로 소를 타고 간 노인을 찾아보았으나 찾지 못했다. 노인이 일러준 자리에서 궁권터까지는 정확히 10리라 하여 '갈왕往'자를 넣어 왕십리라 하였으며, 무학 대사는 스스로가 무지無知하고 학식이 없다 하여 무학無學 이라 지칭했다고 한다.


2번째 유래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먼저 왕십리에 터를 잡고 또 역사의 시작을 위해 땅을 고르는데 홀연히 왕십리라고 돌에 새긴 도선 대사의 비기秘記가 나왔다. 도선은 고려 초기의 유명한 도사로서 몇 백 년 후에 무학이란 승려가 그곳에 와서 도읍터를 잡을 줄 알고 이 석비를 새겨 묻은 것으로, 비기에는 십 리를 더 가라는 뜻이 적혀 있었다.
무학은 크게 깨달은 바 있어 다시 무학재에 올라서서 도성을 쌓을 터전을 측량하고 공사를 시작하였다.
왕십리와 무학재는 그때에 생겨난 이름이라 한다.

그러나 이곳은 경복궁과의 거리가 10리 지점에 있지 못하고 20여 리나 떨어진 곳이며, 도성으로부터 10여 리 떨어진 거리에 있기 때문에 그러한 전설은 사실과 거리가 있는 듯 하다.
위와 같은 전설을 보면 한양 천도를 위해 실로 태조의 심신을 수고롭게 한 바가 많았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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