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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일반

프랑스의 버블사건 "미시시피 버블"에 대하여 알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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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시시피 버블(미시시피 계획)은 18세기 초에 시작되었다. 

네덜란드 튤립 버블에 등장했던 전쟁이 관련한다. 네덜란드 지역이 스페인 제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80년 전쟁 외에도 종파 대립으로 인한 전쟁이 빈발하는 등 당시 유럽은 혼돈의 시기였다. 

 

오랜 기간 이어진 전쟁과 혼란 탓에 국가 재정은 어려워졌고, 금속화폐의 귀금속 함량을 줄여 재주조하는 일이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그 영향으로 통화로써 사용하던 금화와 은화의 가격은 불안정했다. 

특히 프랑스 정부는 막대한 채무로 인해 재정이 파탄으로 치달았고 결국 프랑스 혁명이 발발했다. 

 

전쟁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베르사유 궁전을 세우고 '태양왕'이라고 불리며 마음껏 영화를 누리던 루이 15세는 결과적으로 재정을 핍박시킨 장본인으로 꼽힌다. 

당시 누적 채무는 국가 예산의 17배를 넘어서는 엄청난 액수였다. 

프랑스 왕립은행 삽화

◆ '존 로'의 재정 재건안 

 

궁핍한 재정 상태가 지속되는 가운데 루이 15세가 왕위에 올랐다. 이때 그의 조부인 오를레앙 공 필립 2세가 재정의 재정비를 위해 채용한 것이 미시시피 계획이며 여기에는 존 로의 시스템이 적용되었다. 

 

존 로는 프랑스인이 아니라 스코틀랜드이인이었다. 은행업을 하다가 런던에서 투옥되었지만, 탈출하여 유럽을 떠돌았다. 도망친 후에도 은행가로서 일했고 암스테르담, 파리, 제노바, 베네치아 등지를 돌며 당시 지역별로 제각각이었던 경제 시스템을 연구한 뒤 새로운 시스템을 고안하여 각지의 유력자에게 제안했다. 

그러다가 필립 2세에게 발탁되었다. 

 

존 로는 그때까지 유럽에서 왕도라고 여겨지던 중상주의를 비판하고 새로운 화폐 이론을 제창했다. 중상주의에서는 무역을 통해 귀금속이나 금속화폐를 축적하는 것이 국부를 늘리는 이상적인 방법으로 여겨졌다. 

존 로

중세 유럽에는 금속화폐가 존재했지만, 소재가 되는 금과 은이 항상 부족했기 때문에 유통은 성행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12세기부터 13세기에 걸쳐 농업이 발전하면서 농촌경제가 번성했다. 뒤이어 도시가 형성되고 상업활동이 활발해지면서 그와 동시에 화폐를 사용한 거래나 납세 등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이후 각국에서 무역이 성행했다. 몽골 제국이 쇠최하면서 오스만 튀르크의 세력은 확대되었고 그렇게 대항해시대로 접어들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아프리카와 아메리카 등지에서 약탈을 일삼았다. 16세기 이후 본격적으로 광산이 개발되기 시작했고 아프리카, 중남미에서 대량으로 금과 은이 유입되었다. 그에 따라 소재 부족 현상이 해소되면서 금속화폐에 의한 경제가 확대되었다. 

 

하지만 금속화폐는 일부 부유층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왕실은 전쟁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징세권을 팔거나 영토를 저당 잡히기도 했기 때문에 서민에게 거두어들인 세금은 부유한 사람들을 더욱 부유하게 만들었다. 한편 왕국 자체 재정은 궁핍했고, 서민은 어쩔 수 없이 빈곤한 생활을 이어갔다. 

 

◆ 금속화폐에서 태환지폐로 

 

돈이 돌지 않는 한 경제 활동은 살아나지 않는다. 그렇게 프랑스는 심각한 디플레이션 상태에 빠졌다. 

그때 존 로는 금속화폐에서 태환지폐(소유자의 요구에 따라 언제든 금화등 실물화폐로 교환할 수 있는 종이돈)로 전환할 것으로 주장했다. 

 

금속의 양에 구애되는 화폐 통화량을 극적으로 증가시켜 경제를 재정비하고자 한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금융 완화이자 통화를 찍어내서 경기를 재부양시키는 리플레이션 정책이다. 

 

존 로는 1716년에 왕실로부터 지폐로 된 은행권을 발행할 수 있는 유일한 은행 '뱅크제너럴'의 설립을 승인받았다. 

태환지폐였던 은행권은 언제든지 금속화폐로 교환할 수 있었기 때문에 높은 신용도를 자랑했다. 

그 외에도 필립 2세를 설득하여 납세를 은행권으로 내도록 제도를 변경하고, 무역 결제에도 사용될 수 있도록 환전업자를 압박하여 지폐 사용의 확산을 노렸다. 

곧 지폐는 널리 통용됐고 지폐 유통량도 큰 폭으로 증가하면서 디플레이션이 해소되었으며 경기는 경이적인 속도록 회복되었다. 그에 따라 뱅크제너럴은 2년 후에 국유화되어 왕립은행이 되었다. 

미시시피버블 풍자 삽화

여기서 문제가 발생한다. 태환지폐는 언젠가 금속화폐로 교환되어야 하므로 금속화폐의 양을 넘어서는 지폐를 발행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왕실은 종이 하나로 궁핍하기 짝이 없던 재정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 믿었기 때문에 더 많은 지폐 발행을 촉구했다. 원칙대로라면 은행은 발행한 지폐에 상응하는 금속화폐를 소유하고 있어야 했지만, 그것을 뛰어넘는 양의 지폐를 발행하게 되면서 결국 불환지폐로 변경하기에 이르렀다. 

 

왕립은행이었던 만큼 사람들은 은행을 믿었고 지폐의 신용은 지켜졌다. 그렇게 지폐가 증쇄되면서 호경기가 시작되었다. 호경기였지만 여전히 공적채무 즉 국가의 빚은 막대한 상태였다. 당시 프랑스 국채는 신용이 없었고 액면가보다 낮게 거래되었다. 게다가 시중에는 보증도 안 되는 불환지폐가 나돌고 있었다. 

 

◆ 국채를 미시시피 회사 주식으로 

 

존 로는 다음의 한 수에 나섰다. 서방 회사를 설립하고 정부 힘을 빌려 프랑스의 해외 무역에 대한 독점권을 확보 한 뒤 

'미시시피 회사'라고 이름 붙였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미시시피 회사는 당시 프랑스 식민지였던 북미대륙의 미시시피강, 루이지애나 주변 개발을 계획하고 있었다. 

 

루이지애나에는 금광이 있고 개발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으므로 곧 프랑스는 막대한 부를 손에 넣을 것이라고 선전했다. 그러면서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을 국채의 액면가로 교환활 수 있게 했다. 지금으로 말하면 채무를 주식으로 전환하는 이른바 출자 전환이다. 이에 따라 사람들은 앞다퉈 국채를 주식으로 바꿨고 국가채무는 점차 해소되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모든 문제가 해결될 리는 없다. 그동안 변제받지 못할 것으로 여겨졌던 국채가 좋은 조건에 주식으로 교환되었을 뿐만 아니라 주가는 나날이 상승했고, 반년 사이에 주가는 무려 20배가 되었다. 별 볼일 없던 국채가 가파르게 상승하는 주식으로 변했으며, 그 덕에 갑자기 부자가 생겨났다. 

그들은 손에 놓은 돈으로 부동산과 귀금속을 샀고 그 가격은 상승했다. 부자가 되고 싶은 사람은 미시시피 회사의 주식을 매매하는 장소로 모여들었고 그 지역 집세가 급등했다. 

그 밖에도 다양한 비즈니스가 생겨났고 공전의 호경기가 찾아왔다. 

그야말로 버블이다. 

그런데 미시시피 회사의 개발 자체는 순탄치 않았다. 

새로운 귀금속이 들어오기는커녕 보증 없는 종잇조각만 대량으로 뿌려졌을 뿐이었다. 

이때 일부사람들이 미시시피 회사의 개발에 의문을 품었고 지폐의 가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불환지폐였기 때문에 교환할 의무는 없었지만, 불안함을 느낀 사람들이 지폐를 금속화폐로 바꾸기 위해 몰려들면서 대소동이 일어났다. 

 

이를 계기로 미시시피 회사의 주가는 폭락했고, 금속화폐로 교환이 어려워진 지폐는 가치가 추락했다. 

액면가의 몇 %만 그 가치로 인정되면서 인플레이션이 발생했고 많은 국민은 곤궁에 몰아넣었다. 

 

그 결과 튤립 버블과는 달리 경제와 금융 시스템이 완전히 무너졌다. 미시시피 버블은 프랑스 전역을 경제적 혼란에 빠트렸고 빈부 격차를 더욱 심화시키면서 프랑스 혁명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경제 실책이 국가를 전복시킨 하나의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출처 저자 사와카미 아쓰토,구사카리 다카히로의 "금융버블붕괴"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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